몇 년 전 미국 생명공학 벤처기업 어드밴스크 셀 테크놀로지(ACT)라는 생명공학 회사에서 인간배아복제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또 최근에는 서울대 '황석우' 교수팀이 줄기세포와 관련된 획기적 연구결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는, 공상과학 만화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생명창조는 그에 맞는 거죽을 만들고, 또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의미.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수십만의 영혼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신명나는 굿판은 물론 정안수 떠놓고 조앙신에게 아들의 성공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떠나 보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깨어진 명경으로 바라보는 흐릿한 영상들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두 대 밖에 없던 시절.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이 열리는 밤이면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밥숟가락을 놓고 모두들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텔레비전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방 한 가운데 놓여 있고 동네 사람들은 마루까지 빼곡이 앉아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김일 선수가 등장하면 어느새 그 집은 동네가 떠나갈 듯한 환성과 아쉬운 탄성이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한판 '굿'이 열리는 것이다. 김일 선수는 등장해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신화적인 인물이었으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구심점이었다. 우리의 굿이 그러했던 것처럼.

▲ 주술적 성격을 지닌 오색 구름다리 ⓒ 무속연구가 양대석
무(巫)는 연결이자 단절의 의미
1. 청신(請神) 굿이 열리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굿판이 벌어지는 집으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굿은 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다 주었다. 때론 웃고, 울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의 응어리를 신명나는 굿판에 풀어냈다.
굿판에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면 무당은 판을 시작한다. 굿은 신을 모시는 과정인 ‘청신’으로 시작하는데 이 때는 의뢰인인 ‘단골’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분노인지 한인지 모를 그런 것들이 가슴 가득히 들어차도록 다그치고, 어르면서 닫아 두었던 상처들을 하나 둘 끌어낸다.
2. 오신(娛神) 단골의 슬픔과 응어리가 절정에 이르면, 무당은 신령을 청한다. 접신을 위한 춤과 주문 후에 약간의 긴장이 흐르고 무당은 어느새 접신이 되어 먼저 떠난 서방이 되고, 자식이 되고, 또 척신이 되거나 병마가 되어 있다.
신령이 망자인 경우 굿판은 무당을 통해 이야기하는 망자와 단골의 한 맺힌 대화로 여기 저기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또 척신이나 병마일 경우에는 탄성이 울리곤 한다.
3. 송신(送神) 그렇게 가슴에 맺혔던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막상 신령을 대하면 이상하게도 할 말이 없어진다. 이미 연을 달리했기 때문일까?
둘의 대화가 끊기고 적막이 흐르면 어느새 신령은 ‘잘 살라’ 또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순간 그 서러움과 안타까움에 단골의 감정은 극에 달하고 그것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그러는 사이 가슴에 쌓인 한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씩 사라져 간다. 그렇게 망자는 떠나가고 산자는 삶을 지속해 가는 것이다.
한국의 굿 샤머니즘(Shamanism), 그 상처의 시간들
굿, 이제는 낯설기만 한 이 단어가 한때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자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 굿의 발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로까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무당이 들고 있는 장신구(방울, 칼, 거울)들이 당시의 청동 제품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굿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국가적인 행사는 물론 일반 평민들도 무당을 신성시하고 굿을 친숙하게 여겼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가 유입되면서 그 세가 꺾이기 시작한다. 신성시되던 무인(巫人)의 신분이 천민으로 전락되고, 또 천민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수도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한 탄압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굿’이 바로 우리 민족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구심점이자 민족성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물러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그 탄압은 계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굿을 비롯한 모든 샤머니즘적 요소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말살시켜 갔다.
무당의 삶은 피폐해졌고, 그 생명력도 시들어 갔다. 큰무당들이 소리소문 없이 하나둘 명을 달리하면서 기예가 단절되고 음성화되면서 제대로 기술을 전수 받지 못한 선무당들의 등장이 늘어났다. 이전에는 없던 단골이나 구경꾼에게 돈을 추렴하는 일도 이때 발생하게 됐다.
현재에 이르러서야 굿과 무당을 민족문화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복원이라는 의미보다는 박제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재생시키기에는 상처가 너무 많고, 오해와 편견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한국 전통 굿의 종류
많은 굿들이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전에는 다양한 형태의 굿이 존재했었다. 잘 알려진 굿은 천신굿, 나라굿, 신령기자굿, 진오기굿, 병굿, 여탐굿 등이 대표적이다.
천신굿은 새로 추수한 곡식을 신령에게 선 보이고 집안의 평온을 빌던 굿을 말하고 나라굿은 대표적인 병굿인 ‘마마배송굿’과 함께 사장된 굿으로 왕조 시대에 왕가의 요청에 따라서 벌이던 굿. 신령기자는 무당이 스스로를 위해 행하던 굿으로 ‘허주굿’이라고도 불리며 자신이 모시는 신령을 모시는 굿이다.
현재까지 가장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는 굿인 진오기굿은 일명 ‘씻김굿’이라 하여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굿으로 현재도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다.
그외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병굿, 집안의 경사를 조상에 알리는 여탐굿 등이 유명한 굿으로 꼽힌다.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무슨 무슨 굿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다양한 굿을 벌였다.
소멸(消滅), 박제를 위한 씻김
굿판, 언제부턴가 그곳에서 울려 퍼지던 징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다. 이제 박제가 되어 버린 것일까?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무당의 씻김굿을 녹화 방송해 준 기억이 있다. 사람들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진지하게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무당은 조명 현란한 무대 위에서 굿판을 벌였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굿을 아주 깊은 산골 아니면 대도심의 공연장에서나 보게 된 것은 고작 얼마 전의 일에 불과하다.
굿의 소멸이 한국의 전통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이나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그것들이 주된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그 아래서 일종의 조력자 혹은 방관자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근래의 복제인간 얘기가 아니더라도 그 과학과 문명이란 것이 전해 준 달콤함에 우리가 그것들을 스스로 멀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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